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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ie de Vivre. A delight in being alive; keen, carefree enjoyment of li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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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나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스무 살을 떠올리면, 약속에 늦은 사람처럼 늘 초조해하던 마음부터 생각난다. 약속 시간은 이미 지났고, 길은 꽉꽉 막혀 있는데, 버스는 신호마다 다 걸리고 마는 그럴 때의 마음.

스무살이, 대학생이, 성인이 되면서 이제 막 무언가를 시작했다고 여겼는데, 마음은 벌써 초조했다. 막히는 버스에 갇혀서 내다보면 거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세상에서 제자리를 찾아내 부지런히 살아가는데, 나는 그냥 이 도시를 부유하는 사람 같았다. 나도 뭔가 되어야지, 내 자리를 찾아야지. 그러려면… 뭐부터 해야 하더라? 막막한 맘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나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열심히 해야 하는데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하는지는 몰랐으므로, 일단 열심히 했다. 남들이 해야 한다고 말하는것, 20대에 꼭읽어야 할 도서 100선이라든가, 배낭여행, 대외활동처럼 그 나이 때 으레 해야 한다고 여기는 경험들. 심지어 연애까지도. 세상은 끊임없이 이걸 안하고 뭐하고 있냐고 묻는 것 같았다.

수업에 들어가면 교수님이 “요즘 애들은 치열함이 없다”며 고생스러운 경험을 장려했고, 서점가의 베스트셀러들은 나 자신을 이겨내라고 부추겼다. 엄마와 통화 할 때면 “딸, 잘하고 있지?” 하는 살가운 걱정이 카스텔라처럼 목을 막았다. 그런 말들에 치이며 어물어물하는 사이, 야무진 친구들은 이미 저만치 앞서 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산 것도 아니다(그럴 수 있었으면 이런 고민도 안 했겠지). 뭘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채로, 막연한 의무감과 죄책감 사이를 왔다 갔다 했을 뿐이다.
낮잠이라니, 그 시간에 책이라도 한 자 더 읽어. 방학 때 또 허송세월할거야? 어디 스터디 라도 나가 봐. 술 마실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해봐라, 뭐가 돼도 됐겠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의 리스트는 자꾸만 늘어갔고 한 줄씩 지워나가지 못할 때마다 자신을 탓하기 바빴다. 그때의 내겐 삶도 잘 해내야하는 과제 중 하나였다. A+은 받지 못하더라도 B정도는 받아야지, F일 순 없잖아, 뭐 그런 생각들. 지금 생각하면 의아하다. 대체 A인 삶이 뭐라고 생각한걸까? B나 C는?

돌아보면 그 시절의 나에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정확히는 해야 한다고 믿는 일들. 그렇게 무리했으니 과부하가 걸리듯 한 번씩 된통 몸살을 앓곤했다. 아플 때면 비로소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던 ‘나’를 자각할 수 있었다.아픈 것은 누가 대신 해줄 수가 없었다.

이게 내 몸이라는것, 이 고통이 나의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순간의 고독은 누구도 돌봐줄 수 없다는것….그런 자각이 몸 안으로 밀려 들어올 때면 생각했다.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던 사실. 내 인생을 살아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니 남의 인생이나 세상의 기준을 따라가려고 애쓰면 이렇게 고장 나고 말 거란것. 피곤하게 살려고 들면 영영 피곤할 수밖에 없고,내가 맘먹지 않으면 내 삶은 즐거워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열이 내리고 팔다리에 조금씩 힘이 들어갈 때면 땀에 전 옷을 벗고, 샤워를 하고, 아끼는 옷을 입고, 햇살이 좋은 거리로 나가 가뿐히 걷고 싶어졌다.
그리고 조용한 카페에 앉아 나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런 때 비로소 나는 ‘잘’ 살고 싶어졌던 것 같다.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그때부터 삶에서 ‘해야 한다’를 지워나가는 연습을 시작했다. 엄밀히 따져보면 인생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반드시’가 붙을수록 그럴 필요가 없는 일들이 많았다. 그건 그냥 선택의 문제다. 무언가를 할지 안할지는 내가 정하면 된다.

남들이 다들 한다고 해서 따라할 필요도, 세상이 등 떠미는 말들에 쫓길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잘하지 않아도 된다. 인생은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니까. 무엇이든 ‘잘’ 하려고만 하니 힘들었던 것이다. 그냥 해도 되는데. 자신을 미워할 만큼, 현재를 희생해야 할 만큼 꼭 해야 하는 일이란 세상에 없지 않을까.





그 전까진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다고 여겼는데, 그렇게 해서 생긴 빈자리에 비로소 ‘하고 싶다’가 생겼다. ‘해야 한다’를 비워내면 ‘하고 싶다’가 생긴다는 것. 시간이 늘 부족하다고만 여겼는데, 해야 한다고 믿는 것들로 시간표를 꽉꽉 채워놓았던 것뿐이었다.

마음에 빈틈이 생기자 가고 싶어 여행을 가고, 하고 싶어 새로운 일을 하고, 보고 싶어 누군가를 만나는 즐거움도 알게 되었다. 해야 할 것 같아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스펙이 아니어도 내 안에 경험으로 쌓였다. 내가 바라는 건 그런 삶이었다.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닦달하지 않는삶. 성취를 위해 현재를 지워버리지 않는 삶.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건 없다. 그냥 내 삶을 살면 된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도 없다. 다만 나를 잊지 않으면 될 뿐이다.

사주를 보는 게 취미인 친구가 있다. 취업은 언제 되나요, 남자친구는 언제 생기죠, 회사 그만둬도 되나요, 이직하면 나아질까요…? 친구는 스무 살 애송이 시절부터 앞날이 답답할 때마다 찾아가 인생 상담을 나눈 그들을 ‘멘토님’이라 부른다. 신림동 멘토님, 홍대 멘토님, 인천 멘토님들이 친구에게 정답처럼 해온 말이 있다.

“대기 만성형이라 40대에 잘 될 거야. 기다려.” 힘을 얻고 돌아온 친구가 “그래서 나 40대에 잘된대!” 할때면 나도 늘 똑같이 해주던 말이 있다. “…우리 같은 애들은 웬만하면 대기만성형이야.”

그럴 수밖에. 내가 불꽃처럼 타오르다 스무 살에 요절할 예술가도 아니고. 20대엔 이것저것 찔러보며 헤매다가, 덜 힘든 것과 아주 힘든 것과 아주아주아주 힘든 것 사이에서 덜 힘든 것을 선택하게 된다.

덜 힘든 것의 이유는 다양하다. 좋아하는 일이어서 덜 힘들거나,돈을 많이 줘서 덜 힘들거나, 노후 걱정이 없어서 덜 힘들거나. 그렇게 서른 전후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나면 30대엔 어떻게든 그것을 한다. 그러다 보면 해가 바뀌어 나이를 먹듯이, 뭐라도 조금씩 나아지게 되어 있다. 그걸 대기만성이라 부른다면(…) 우린 모두 대기만성형 인간들이다.

20대라는 것은 특히 20대 초중반이란 것은, 내 것은 하나도 없는 채로 내 것을 찾아가는 시기다. 그땐 그것을 몰랐으니 가진 것 없는 현재가 불안했고, 세상에 어떻게든 내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생기는 것들이 있었다.

희미하던 내가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라고 하면 될까. 어려서는 유행하는 옷만 따라 입다가 차츰차츰 자신에게 어울리는, 딱 맞는 스타일의 옷을 찾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어른이 아닌 ‘내’가 되어 간다.


- 대학내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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